아빠와 현충일

명찰 롱 copy

2021년 6월 6일 09:20 UTC-04:00

아빠와 현충일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패닉에 빠진 사람이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 아빠에게 평생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4년 후 엄마가 계신 곳에 합류하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4년은 공허했고 외로웠으며 병들고 연로한 몸이 스스로도 부담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아빠는 내가 성실하고 엄격하고 해결사인 엄마를 닮았다고 하나 나는 아빠를 닮은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아빠와 나는 B형 꼴통. 나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친할머니를 꼭 빼닮았다고 한다. 아빠는 호기심과 흥이 많으신 분이다. 나는 아빠가 짜증을 내거나 수심에 잠겨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진짜 부지런하셨다. 새벽 조기 축구를 70세 때까지 하셨던 걸로 안다. 

내 기억 속의 아빠는 항상 뭔가를 하고 계셨다. 천성이 유쾌하시고 항상 즐거우셔서 그랬는지 돌아가실 때까지 주위에 친구분들이 많으셨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미국에서 딸과 함께 사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신 이유도 매일 만나시는 친구분들이 그 이유였다는.

아빠의 고향은 평안도. 6형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우리 아빠는 친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부산에 살고 계신 삼촌 댁을 심부름 겸 방문하기 위해 형과 함께 내려왔다가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다. 아빠는 고등학생의 나이로 참전하셨고 육군 상사로 전역하셨다.

돌아가시기 8개월 전… 나는 간호부장직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나가서 아빠를 돌봤다. 직장은 또 구할 수 있어도 부모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엄마 때 경험한 이유이다. 머리맡에 4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나는 그렇게 한국으로 향했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에 많이 우셨다. 세상에 혼자 남겨질 딸 때문에 마음 아프시다고… 그러나 아빠의 죽음은 엄마의 죽음 이후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 비슷한 것을 해결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천 호국원에서의 합동 장례 의식은 아름다웠다. 아빠 엄마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언덕도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슬펐다…

그리고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도 이젠 5년이 지났다. 매년 현충일이 되면 아빠가 많이 생각난다. 청소년의 나이에 참전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아빠의 인생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부지런하고 유쾌했다.


※ 세계적 가수였던 아빠와 그의 딸… 서로 다른 시대에서 녹음된 노래를 듀엣으로 편집한 곡

SPIKA STUDIO

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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