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 작렬

명찰 롱 copy

2021년 7월 10일 22:40 UTC-04:00

뒤끝 작렬

오늘은 제가 고백하나 하려구요. 미국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살면서 제 주위엔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분보다는 주로 직장 동료나 일 관계의 사람들이거든요. 일할 때 만나고 퇴근하면 헤어지는 사람들. 주로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의견 충돌이 있기도 하지만 다음 날 되면 또다시 반갑게 인사하고 일 얘기로 또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되는 사람들.

교회도 오랫동안 현지인 교회를 다니며 교회에서 반갑게 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정도였지요. 사는 동네도 한국인이 거의 전무한 동네에 살면서 오며 가며 아는 얼굴들은 그냥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만 묻는 정도.

그리고 간호사의 삶이라는 게 근무 시간 동안 영혼이 다 털려서 일 끝나고 나면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져요. 저는 일 끝나도 병원에서 하도 전화를 많이 받고 응급 상황으로 다시 병원으로 달려가는 일이 많아서 웬만하면 개인적인 친목을 위해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이 살았습니다.

제가 한국인들과 유일하게 소통하는 공간은 페이스북이었어요. 외로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거의 매일 같은 페친들과 글로 소통하면서 실친에 가까운 친밀한 느낌을 가졌던 것 같아요. 같이 웃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권면하고… 저는 진심을 다해 소통했던 것 같아요. 지금처럼요.

그런데 지난 3,4,5월… 페이스북으로 마음이 많이 다치고 페친으로 연결되어 있던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실망을 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를 음해했던 잘 모르는 사람들보다 페친으로 계셨던 분들로부터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양다리를 걸치는 모습을 보는 것, 억울함으로 힘들어할 때 방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어요.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저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며 제 곁을 든든히 지켜주시던 친구분들도 계셨습니다.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어요.

어제 페이스북 계정을 새로 오픈했는데 페이스북이 알아서 사람들 리스트를 올려주더라구요. 리스트에 올라오는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 낯익은 얼굴들이었습니다. 제 페친이었던 분들도 있고 저를 음해하는 자들과 섞여 같이 공감하며 비판하고 놀리던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제 고백은 지금부터입니다.

제 몹쓸 기억력이 모든 것들을 다 다시 떠오르게 하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것까지 다 외우는 이상한 습관이 있거든요. 병원 각 부서 전화번호, 환자의 가족 명단, 검사 수치 전량 등 안 외워도 되는데 외웠어요. 제가 사진 찍는 방식이나 손가락 위치로 외우는 습관이 있어서 간혹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외워버리는 것도 있어요. 별로 좋은 것 아닙니다. 어디선가 봤던 기분 나쁜 댓글들, 저를 조롱하는 글에 웃으며 공감했던 사람들, 저를 욕하는 글에 따봉을 눌렀던 사람들 등등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이 납디다. 차라리 성경 말씀을 이렇게 빠짐없이 다 외우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안 좋은 일이 또다시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선이지만… 솔직히 그 서운함과 억울함이 아직도 남아 제 손가락은 하나하나 차단 버튼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어요. 나도 뒤끝 작렬인 사람이구나… 예수님께서 뒤끝 작렬인 분이셨다면 과연 이 세상은 지금 어땠을까.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대하심을 조금이라도 본받지 못한 제 자신을 발견하며 부끄러웠습니다. 인자함과 관대함의 영역은 죄에 대한 처벌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어느 범법자에게 인자하고 자비롭게 대해 줄 수는 있으나 죄를 범한 것에 대해서는 법이 정한 처벌을 받아야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뒤끝이 작렬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부터 고쳐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ㅠㅠ

SPIKA STUDIO

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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