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국

명찰 롱 copy

2021년 12월 17일 14:59 UTC-04:00

곰국

오늘 반가운 지인이 클리닉 첫 고객님으로 오셨다. 바로 내가 예전에 근무하던 병원의 스패니시 청소부 아주머니.

나를 딸처럼 예뻐해 주셨던 분이다. 직장에 출근하면 내가 좋아하는 컬럼비안 커피를 시간에 맞춰 내려놓고 가끔 내 사무실 책상 위에 자기가 만든 엠파나다를 올려놓으셨던 분. 그것뿐만이 아니다. 내가 이사를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갑자기 우리 집으로 찾아와 짐이 나간 집을 돈도 받지 않고 말끔히 청소해 주셨던 분.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 아주머니와 친하게 지냈다. 이분은 경력이 길고 노련하여 이 분 손길이 닿는 곳마다 구석구석 반들반들했다. 희한하게도 나는 어느 근무지에서 일을 하든지 간에 그곳 청소부 직원들과 친해진다. 아마도 울 엄마의 영향일 것이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충격과 감동으로 남아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그 당시 중딩이었던 것 같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엄마는 하루 전날부터 집에 있는 큰 냄비 몇 개를 꺼내어 곰국을 끓이셨다. 집에 손님들이 오시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손님들은 다름 아닌 동네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었다. 족히 30명 정도 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 청소하시던 근무복 차림 그대로 오셔서 우리 집 거실에 펴놓은 밥상에 둘러앉아 시끌벅적 얘기 나누며 곰국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가셨다.

어른이 되어서야 이 일이 이해가 되었다. 고아로 자라셨던 울 엄마는 어린 시절 안 해보신 일이 없다고 하셨다. 그중에는 길거리의 유리병이나 폐지를 줍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부모님(나도 뵌 적 없는 외조부, 외조모님)이 어떤 분들이셨을지 참 궁금하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그러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시던 말. 사람들이 부자, 의사, 판사가 되는 건 지들 똑똑해서 되는 게 아니다. 다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게 된 거다. 그러니 어떤 사람도 무시하지 마라. 그들도 부모를 잘 만났으면 의사, 판사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엄마가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그 메시지는 내가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병원에서 환자, 보호자, 직원들을 대함에 있어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어떤 거만한 의사나 돈 많은 환자의 갑질도 내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학벌, 지위, 재물, 배경, 출신 등이 내겐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내겐 다 똑같은 “사람들”일 뿐. 부모 잘 만나서 잘 된 사람들과 다른 환경에 처해져 자라온 사람들의 차이일 뿐이다. 내게 있어 사람들이란 딱 두 종류. 내 편과 저짝편. 이것이 바로 내가 “의리”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이다.

시술을 했는지 수다를 떨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자기 친구, 이웃들 다 끌고 또 오시겠다고 한다. 내가 책임지고 10년 세월을 얼굴에서 지워드리겠다 호언장담을 하며 보내드렸다. 다음 장을 볼 때는 소꼬리 뼈를 사다가 곰국을 끓여야겠다. 우리 청소부 아주머니가 앉아있다 가신 자리에서 자꾸 고소하고 진한 곰국 냄새가 난다.

SPIKA STUDIO

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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